<책 소개>
공학도에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의 길을 걷기까지
<지은이 소개>
정인조
어릴 때부터 ‘한양 천리’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의 고등학교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1971년 2월, 겨울의 끝자락에 대학교를 진학 하러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이 마련해준 두툼한 솜이불 보자기를 들고, 고향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50년이 지났다.
<프롤로그>
어릴 때부터‘한양 천 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고향 합 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 러 고향을 처음으로 떠났다. 그 후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부모님이 마련해 주신 두툼한 솜이불 보자기를 들 고, 고향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칠순 을 맞아 인생을 되돌아보니 가장 먼저 부모님이 아른거리 고, 다음으로 살면서 만난 수많은 인연이 생각난다. 이제까 지 함께한 가족과 이웃의 사랑이 내 마음 한가득 차오른다. 문득 삶이 무거울 때는 무작정 고향 마을을 찾곤 했다. 마 을 근처에 있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면 마음이 이내 차분해 졌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사무치게 그리워 단숨에 달려가 고 싶었지만, 바쁘고 버거운 삶에 치여 고향까지 닿을 수 없 을 때가 더 많았다. 언젠가는 머나먼 그곳, 내 고향에 걸어 서 가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렇게 생각한 지 40년이 훌쩍 지났다. 더 늦기 전에 이 꿈을 이루고자 특별한 걷기를 도 모했다. 2021년 8월 19일, 파주 임진각에서부터 합천 고 향마을까지 500km 걷기 행사가 시작되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사회가 내게 베푼 것에 보 답하며, 이웃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다. 우리나라 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후에 끊임없는 상호불신 의 늪에 빠져 지낸 지 70년이 지났다. 유라시아 대륙으로 가려면 육로인 철도를 놔두고 항공과 선박 편으로 갈 수밖 에 없는 섬나라가 되어버렸다. 기나긴 정전의 세월을 청산 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마저 내 한 걸음, 한 걸음에 담 고 싶었다. 이 책에 2021년 여름, 고향을 향해 18일 동안 걸었던 하루 하루를 담았다. 더불어 길을 걸으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 던 내 삶의 여정을 정리해 보았다. 1952년 경상남도 합천 군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지우지 못한 고향에 대한 향수와 70여 년의 삶에서 맺은 인연들에 대한 감사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배우고 공학도로 살아온 ‘철’ 학도이지만, 아직 철이 덜 든 내가 직접 써 내려간 이야기 를 조심스레 시작해 본다.
2023년 7월 11일 정인조
<책 미리보기>
내 고향마을, 갑산
내가 태어난 갑산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갑산면에 서 면 이름과 같은 갑산이다. ‘원갑산’으로도 알려진 오래 된 역사를 지닌 마을로 산줄기로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미타대암단맥의 마지막인 용덕산(해발 231m)이 마을 북쪽과 서쪽을, 황강이 동쪽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용덕산은 조선시대 초계군수가 가뭄 때 이 산에 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해서, 이곳은 용의 덕을 보는 것이라 해서 ‘용덕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 해진다. 무운절(묵은 절, 古寺)이라고 부르는 뒷산 자락의 밭은 옛 절터였음이 밝혀졌다. 그곳에서는 고려 시대 사용 하던 종이 발굴되기도 했다. 마을 앞 황강 건너엔 우리 초계 정가의 시조를 모신 옥전서원이 옛 가야 소국인 다라국의 옥전고분과 나란하게 있고, 마을 뒷산엔 진양 강씨 선영이 있는 갑산재, 옆 마을엔 초계 변씨 시조 사당인 영모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설의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23-24p)
병마와 함께한 어머님의 삶
이미 저세상으로 간 동생을 낳은 뒤에 얻은 척추결핵으로 어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고생하셨다. 어린 나이에 동 네 사람들이 “인천댁 오늘을 넘기겠나?”라고 수군대는 말 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 말이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자라면서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유명한 무당을 불러 벌였던 굿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중략)
그 당시에 나는 한가지 버릇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대구에서 고향 집을 다녀올 때, 고향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고향마을이 있는 고개를 단숨에 올라서 마을 복판에 있는 우리 집을 살폈다. 우리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머님이 별세하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살펴본 우리 집이 조용하면,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큰아들보다 13살이나 어린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구로 유학을 떠난 후에도 아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들었다
(28-29p)
고지기였던 아버지의 삶
198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경술국치(1910년) 다음 해인 신해년에 없는 집안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격동의 시절을 온몸으로 체험하신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랭이 촌농부였다. 아홉살 땐 꼴 머슴으로 살았고, 일제 시기엔 일본 오사카와 고베항의 일용 노동꾼으로 다녀오셨다고 했다. 마을 초계 변씨 종중 논밭을 경작하는 고지기(창고지기) 역할도 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한평생을 살다가 가셨다. 아버지가 고지기 역할을 했던 나의 어린 시절, 온 가족이 변씨네 묘사 음식을 만들 때는 정말 즐거웠다. 아버지와 함께 변씨 묘사에 참석해서 이분들의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이내 아버지의 직업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을 눈 치를 채고는 따라다니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 해보니 가족을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신 참 자랑스러운 아버지셨다.
(33-34p)
‘Korean Diaspora’의 DNA
외가는 1938년에 만주로 이주했다. 외사촌 4남매와 조카 15명은 하얼빈 부근 상지시에서 자랐고, 현재 그 손자들은 남쪽 남영에서부터 서쪽 시안까지 전 중국에 걸쳐 살고 있 다. 장인 어르신 형제들은 1930년대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한 분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서 귀국했고, 한 분은 전후 일 본으로 귀화해서 처사촌들이 후나바시에 살고 있다. 어쩌 면 우리 가족은 바빌론 유수(B.C. 587~ B.C. 538)후 고향 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대인 같은 ‘Korean Diaspora’라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외가의 상황은 이렇다. 혼란하던 시기에 살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했고, 해방이 바로 생이별이 된 것이다. 이산가족의 애환은 현대 우리 민족사의 일부 이기도 하다. 1979년, KBS의 ‘사회교육방송’에서 친정 식구를 그리는 어머님의 육성을 내보냈다. 왕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식이라도 찾기 원하는 마음에 부모님의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방송국에 가져가서 방송한 것이다. 그해 12월 친정 조카가 고모부를 애타게 찾는다는 편지를 받고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었고, 가족들과 연락이 된 기쁨에 어머님은 40년 지병이 호전되었다.
(46-47p)
<서지정보>
초판 1쇄 2023년 7월 11일
글/사진 : 정인조
펴낸곳 : 이분의일
판형 : 132*392
페이지수 : 162p
ISBN 979-11-92331-54-6 (03810)
<책 소개>
공학도에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의 길을 걷기까지
<지은이 소개>
정인조
어릴 때부터 ‘한양 천리’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의 고등학교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1971년 2월, 겨울의 끝자락에 대학교를 진학 하러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이 마련해준 두툼한 솜이불 보자기를 들고, 고향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50년이 지났다.
<프롤로그>
어릴 때부터‘한양 천 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고향 합 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 러 고향을 처음으로 떠났다. 그 후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부모님이 마련해 주신 두툼한 솜이불 보자기를 들 고, 고향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칠순 을 맞아 인생을 되돌아보니 가장 먼저 부모님이 아른거리 고, 다음으로 살면서 만난 수많은 인연이 생각난다. 이제까 지 함께한 가족과 이웃의 사랑이 내 마음 한가득 차오른다. 문득 삶이 무거울 때는 무작정 고향 마을을 찾곤 했다. 마 을 근처에 있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면 마음이 이내 차분해 졌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사무치게 그리워 단숨에 달려가 고 싶었지만, 바쁘고 버거운 삶에 치여 고향까지 닿을 수 없 을 때가 더 많았다. 언젠가는 머나먼 그곳, 내 고향에 걸어 서 가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렇게 생각한 지 40년이 훌쩍 지났다. 더 늦기 전에 이 꿈을 이루고자 특별한 걷기를 도 모했다. 2021년 8월 19일, 파주 임진각에서부터 합천 고 향마을까지 500km 걷기 행사가 시작되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사회가 내게 베푼 것에 보 답하며, 이웃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다. 우리나라 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후에 끊임없는 상호불신 의 늪에 빠져 지낸 지 70년이 지났다. 유라시아 대륙으로 가려면 육로인 철도를 놔두고 항공과 선박 편으로 갈 수밖 에 없는 섬나라가 되어버렸다. 기나긴 정전의 세월을 청산 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마저 내 한 걸음, 한 걸음에 담 고 싶었다. 이 책에 2021년 여름, 고향을 향해 18일 동안 걸었던 하루 하루를 담았다. 더불어 길을 걸으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 던 내 삶의 여정을 정리해 보았다. 1952년 경상남도 합천 군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지우지 못한 고향에 대한 향수와 70여 년의 삶에서 맺은 인연들에 대한 감사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배우고 공학도로 살아온 ‘철’ 학도이지만, 아직 철이 덜 든 내가 직접 써 내려간 이야기 를 조심스레 시작해 본다.
2023년 7월 11일 정인조
<책 미리보기>
내 고향마을, 갑산
내가 태어난 갑산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갑산면에 서 면 이름과 같은 갑산이다. ‘원갑산’으로도 알려진 오래 된 역사를 지닌 마을로 산줄기로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미타대암단맥의 마지막인 용덕산(해발 231m)이 마을 북쪽과 서쪽을, 황강이 동쪽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용덕산은 조선시대 초계군수가 가뭄 때 이 산에 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해서, 이곳은 용의 덕을 보는 것이라 해서 ‘용덕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 해진다. 무운절(묵은 절, 古寺)이라고 부르는 뒷산 자락의 밭은 옛 절터였음이 밝혀졌다. 그곳에서는 고려 시대 사용 하던 종이 발굴되기도 했다. 마을 앞 황강 건너엔 우리 초계 정가의 시조를 모신 옥전서원이 옛 가야 소국인 다라국의 옥전고분과 나란하게 있고, 마을 뒷산엔 진양 강씨 선영이 있는 갑산재, 옆 마을엔 초계 변씨 시조 사당인 영모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설의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23-24p)
병마와 함께한 어머님의 삶
이미 저세상으로 간 동생을 낳은 뒤에 얻은 척추결핵으로 어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고생하셨다. 어린 나이에 동 네 사람들이 “인천댁 오늘을 넘기겠나?”라고 수군대는 말 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 말이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자라면서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유명한 무당을 불러 벌였던 굿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중략)
그 당시에 나는 한가지 버릇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대구에서 고향 집을 다녀올 때, 고향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고향마을이 있는 고개를 단숨에 올라서 마을 복판에 있는 우리 집을 살폈다. 우리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머님이 별세하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살펴본 우리 집이 조용하면,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큰아들보다 13살이나 어린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구로 유학을 떠난 후에도 아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들었다
(28-29p)
고지기였던 아버지의 삶
198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경술국치(1910년) 다음 해인 신해년에 없는 집안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격동의 시절을 온몸으로 체험하신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랭이 촌농부였다. 아홉살 땐 꼴 머슴으로 살았고, 일제 시기엔 일본 오사카와 고베항의 일용 노동꾼으로 다녀오셨다고 했다. 마을 초계 변씨 종중 논밭을 경작하는 고지기(창고지기) 역할도 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한평생을 살다가 가셨다. 아버지가 고지기 역할을 했던 나의 어린 시절, 온 가족이 변씨네 묘사 음식을 만들 때는 정말 즐거웠다. 아버지와 함께 변씨 묘사에 참석해서 이분들의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이내 아버지의 직업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을 눈 치를 채고는 따라다니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 해보니 가족을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신 참 자랑스러운 아버지셨다.
(33-34p)
‘Korean Diaspora’의 DNA
외가는 1938년에 만주로 이주했다. 외사촌 4남매와 조카 15명은 하얼빈 부근 상지시에서 자랐고, 현재 그 손자들은 남쪽 남영에서부터 서쪽 시안까지 전 중국에 걸쳐 살고 있 다. 장인 어르신 형제들은 1930년대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한 분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서 귀국했고, 한 분은 전후 일 본으로 귀화해서 처사촌들이 후나바시에 살고 있다. 어쩌 면 우리 가족은 바빌론 유수(B.C. 587~ B.C. 538)후 고향 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대인 같은 ‘Korean Diaspora’라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외가의 상황은 이렇다. 혼란하던 시기에 살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했고, 해방이 바로 생이별이 된 것이다. 이산가족의 애환은 현대 우리 민족사의 일부 이기도 하다. 1979년, KBS의 ‘사회교육방송’에서 친정 식구를 그리는 어머님의 육성을 내보냈다. 왕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식이라도 찾기 원하는 마음에 부모님의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방송국에 가져가서 방송한 것이다. 그해 12월 친정 조카가 고모부를 애타게 찾는다는 편지를 받고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었고, 가족들과 연락이 된 기쁨에 어머님은 40년 지병이 호전되었다.
(46-47p)
<서지정보>
초판 1쇄 2023년 7월 11일
글/사진 : 정인조
펴낸곳 : 이분의일
판형 : 132*392
페이지수 : 162p
ISBN 979-11-92331-54-6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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